"어떤 면에서 레닌은 리처드 로티가 말한 ‘아이러니스트’(ironist)를 닮았다. 로티에 따르면,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의 최종어휘에 대해 급진적이며 지속적인 회의를 갖는” 사람이다. ‘최종어휘’(final vocabulary)란 물론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세계관의 토대가 되는 믿음을 가리킨다(데리다는 이것을 ‘초월적 기표’라 부른다). 레닌에게 그 최종적 어휘란 마르크스주의, 즉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따른 사회주의의 필연성일 것이다. 레닌은 입으론 마르크스의 후계를 자처하면서도 몸으론 마르크스의 핵심적 명제에 대한 ‘급진적이며 지속적인 회의’를 실천했다. 물론 레닌은 포스트모던한 아이러니스트는 아니었다. 로티에 따르면, 아이러니스트가 되려면 다른 조건이 필요하다. 가령 아이러니스트는 “그들의 어휘로 정식화된 논증이 이 회의를 감소시키지도, 해소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자신들의 어휘가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현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레닌은 전형적인 근대인. 그는 또 다른 논증(‘약한 고리’)으로 자신의 회의를 해소하려 했고, 나아가 자신의 어휘가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현실에 더 가깝다고 확신했다. 거기에 따른 위험은 그의 사후 스탈린을 통해 현실화한다.
과거에 혁명은 진리를 소지한 전위들이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외부로부터 주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의 무오류’라는 터무니없는 이론과 숙청의 드라마라는 잔혹한 실천을 낳았다. 그런 것은 한마디로 시대착오, 더이상 현대의 정치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날 세계를 바꾸려는 사람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졌어도, 그들과 내가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신의 믿음을 상대화해야 비로소 타인과 소통이 가능하다. 소통이 가능해야 연대도 가능하고, 연대가 가능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은가.
급진적인 것은 사태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급진적으로 되려면 무엇보다 제 뿌리로 돌아가, 제 신념의 토대를 힘껏 흔들어보아야 한다. 오늘날 사회를 바꾸는 데에 필요한 것은 확신에 가득 찬 혁명가가 아니라, 회의로 번민하는 아이러니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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