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beliefs, anti-intuitions
Monday, January 5, 2015
Tuesday, May 28, 2013
Saturday, May 25, 2013
프랑스와 독일은 퍼주고 놀고도 왜 안 망할까?
2. 유럽의 일상생활 | |||||
-시민의 감시와 고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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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프랑스와 독일은 퍼주고 놀고도 왜 안 망할까? 5. 독일의 비밀병기를 찾아서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의 국가는 일을 많이 안하고 사회보장 혜택을 많이 받으면서도 오랫동안 선진국으로서 경쟁력도 유지하고 있다. 찾기는 어렵지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런 유럽 국가들이 과거 식민지 지배를 통해 쌓아논 부(wealth) 때문에 별로 일하지 않고도 잘 살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은 부(wealth)와 소득(income)을 혼동하는 면이 있으며 또 몇 가지 사실관계만 짚어봐도 잘못됐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16세기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전 세계를 거의 양분하면서 방대한 식민지를 가졌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경제가 시덥지 않고 2011년부터는 심각한 재정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많은 식민지를 가졌던 영국은 제조업 분야에서는 경쟁력이 있는 국가는 아니며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많이 갖는 독일은 식민지가 거의 없는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다. 독일은 식민지 확보 등을 위해 일으켰던 제1·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여 오히려 그간 쌓아놓았던 국부마저 전쟁배상금과 폭격 등으로 큰 손실을 잃고 영토마저 쪼그라들었다. 일본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전후 빠르게 성장하여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였다는 점은 독일과 비슷하지만 현재의 경제상황은 많이 다르다. 일본 경제는 1980년대 후반 한때 세계를 휩쓸 기세였지만 벚꽃(사쿠라)처럼 잠깐 화려하게 폈다가 바로 사그라져 버리고 있다. 일본 경제는 내수부족, 고령화, 디플레이션, 과다한 재정적자 등으로 활력을 잃고 조금씩 위축되고 있다. 거함이 여기저기 작은 누수로 인해 못느낄 정도로 천천히 침몰해가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일본인 스스로도 일본 경제의 미래와 지속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이 상당하다. 역사와 발전과정 등을 볼 때 일본보다 더 오래되고 더 늙은 경제일 수 있는 독일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활력과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과 일본의 어떤 차이가 두 나라 경제를 이렇게 다른 길로 가게 만들었을까? 일본의 폐쇄성을 생각할 때 숨겨논 비밀병기는 일본이 더 많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각 국가의 경제구조, 부문별 산업별 생산성, 소득 및 자산 분배구조, 정치 및 사회체제, 국민성, 문화와 역사 등 여러 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어쩌면 여러 분야의 눈에 잘 안띄는 조그만 차이들이 모여져 경제 전체의 경쟁력과 국민의 삶의 수준을 좌우하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런지 모른다. 이와 관련된 본격적인 작업은 전문지식과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여러 전문가들을 위한 숙제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살아본 사람의 직관과 같은 고민을 한 사람들과의 토론 과정에서 얻은 지식을 기초로 독일의 숨겨논 비밀병기를 찾아보고자 한다. 필자가 찾아낸 비밀병기는 잠수함이나 인공위성 등과 같은 독일만이 갖고 있는 기술력이 아니라 독일은 당연한 것들이 지켜지는 사회 그리고 경제의 기본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즉 첫째, 정직한 사회라는 것 둘째, 정당한 보상시스템이 작동하는 경제라는 것 셋째, 더불어 사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것 넷째, 물가와 부동산 가격이 안정되어 있다는 것, 이 네 가지가 독일 경제의 경쟁력을 장기적으로 유지시키는 핵심요인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것들은 숨겨진 것도 비밀스러운 것도 아니다. 당연하고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실제 다른 나라가 가져다 자기 것으로 만들기는 매우 어렵다. 특히 한국은 이 네 가지가 모두 쉽지 않은 과제이다. * 독일경제 경쟁력의 원천은 독자적인 기반기술을 가진 많은 중소․중견기업이 경제의 중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필자도 독일 중소기업의 강점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중소․중견기업이 강한 일본, 이탈리아 경제를 생각해 보면 강한 중소기업만으로 독일경제의 경쟁력을 설명하기는 충분치 못하다. 어쩌면 강한 독일 중소기업의 존재는 원인이라기 보다 나타난 현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사회가 정직하다는 것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어마어마한 경쟁력이 원천이고 필자의 해외경험으로는 선진국과 후진국이 갈리는 기준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이 정직하면 서로를 신뢰할 수 있어 불필요한 사회적, 경제적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정책 수립·집행이 용이하고 정책 효과보다 정확하게 나타난다. 즉 국가의 효율성이 높아진다. 한국의 경우 대학이나 연구소의 연구개발자금, 중소기업 및 첨단기업에 대한 각종 지원자금이 대상이 잘못되거나 유용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농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농민에게 지원되는 각종 정책자금도 용도 외로 사용되는 경우가 상당하다. 복지와 관련된 자금도 유사한 사례가 많다. 이러한 것들은 사회의 정직성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특히 정치인이나 관료의 정직성과 신뢰성은 그들의 능력을 떠나 역선택과 정책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는 중요한 요소다. 정책당국자들이 정직하다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할 사람을 찾기 쉬울 뿐 아니라 실수를 하는 경우에도 같은 잘못을 두 번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둘째, 독일은 국민 경제에 대한 기여도에 상응한 보상체계가 상대적으로 잘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경쟁력의 원천이다. 엔지니어와 기능인이 높은 대우를 받고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임금 격차가 적고 교수, 의사, 변호사들이 금전적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 독일의 아헨대학(공대가 유명) 에른스트슈마흐텐베르그총장은 2012년 3월 21일자 매일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독일은 이공계의 위기가 없다고 하였다. 기업의 엔지니어가 의사보다 보수가 많기 때문이다. 당연히 뛰어난 인재가 이공계를 선택하고 과학과 공학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의사, 변호사, 교수, 공무원보다는 엔지니어와 기능인, 무역회사 직원, 연구소 연구원이 기술 개발과 수출 증대 등에 더 많은 기여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보상체계를 갖춘 국가가 경쟁력이 강화되고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은 전국에 있는 의대·치대가 다 차야 서울대 공대 지원자가 나온다. 중소기업은 구인난에 시달리고 대기업 입사경쟁은 피 말리듯 치열하다. 젊은이들이 대학졸업도 뒤로 미룬 채 몇 년씩 고시, 사시, 공시 등에 매달린다. 이는 한국의 의사, 공무원, 교수, 변호사 등의 보수, 직업 안정성, 명예, 권력 등 종합적 대우가 비정상적으로 과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도한 대우는 국민 경제에 대한 기여도보다는 자격증의 제한, 진입 장벽, 채용시험 결과 등에 의해 결정되는 지대(rent)와 같은 성격이다. 즉 이들의 대부분은 열심히 일을 했겠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보수의 일부분은 지대와 같은 불로소득인 셈이다. 이와 같은 전문직과 공공부문의 과도한 대우는 민간부문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과도한 격차로 나타난다. 한국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가 국민경제에 대한 기여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같은 기업내에서 거의 비슷한 일을 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임금과 후생복리 등의 차이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과도하다. 경제논리로 보면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는 비정규직은 직업의 안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더 많은 보수를 주어야 한다. 실제 유럽에서는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보수가 높은 사례도 많다. 셋째, 독일이 폭넓은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사회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도 경쟁력 강화에 도움을 주고 있다. 사회보장제도 유지를 위한 높은 세금과 사회보장 혜택에 기댄 노동의욕 감퇴는 분명 경쟁력 약화 요인이지만 사회보장제도가 갖는 사회통합과 사회안전망 기능은 엄청난 경쟁력 강화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대다수 도시의 한 부분은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슬럼지역이 있으며 빈민층은 자포자기로 범죄와 마약에 빠지며 이에 따른 노동력 상실이 심각하다. 또한 치안 등을 위한 경찰력 유지 등 이에 대한 미국의 비용은 만만치 않다. 필자가 아는 한 독일을 포함 유럽의 도시중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지역은 없는 것 같다. 이것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자산이고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사회보장 혜택은 노동의욕을 감퇴시키는 면이 있지만 잘못되었을 때 최악의 상태를 피할 수 있는 안전망이 되기 때문에 경제의 역동성과 경쟁력을 높인다. 사회보장제도가 있기 때문에 개인은 단기적 보수와 안정성에 집착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 창의적인 것에 도전할 수 있다. 이것이 인문학과 기초과학의 발전, 다양한 중소기업의 설립과 성공 등으로 이어져 국민경제가 강해지는 것이다. 독일의 사례에서 볼 때 사회보장제도도 도덕적 해이와 역선택이 적게 잘 구축되면 분배정책으로서 뿐 아니라 훌륭한 성장정책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넷째, 물가안정과 부동산가격 안정도 경쟁력 유지의 큰 요인이다. 독일의 소비자물가는 2000년 이후 연평균 1.7% 상승하여 유럽 중앙은행의 물가상승 목표인 2%를 넘지 않으면서 2%에 가까운 수준을 잘 유지하고 있다. 이와 함께 통독이후 2012년까지 전국주택가격상승률은 1% 내외로 소비자물가상승률보다 낮다. 이와 같은 물가와 부동산가격의 안정은 높은 세율과 적은 노동시간 등을 보완하며 국가경쟁력을 강화시키는 요인이다. 생계비와 주거비가 안정되어 있어 근로자들이 낮은 임금상승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준다. 또한 기업이나 개인 등 경제주체는 부동산가격 상승 등 투기적 이익보다는 생산적인 사업과 자신의 주어진 업무에 열중하게 된다. 즉 개인은 근무시간에 주가나 아파트 시세정보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고 기업가는 땅값 상승 가능성보다는 사업성을 기준으로 공장부지를 결정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독일은 겉으로는 안정되고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역동성있고 경쟁력있는 경제구조를 갖고 있는 셈이다. 반면 한국은 치열한 경쟁 때문에 겉으론 역동성있게 보이지만 실제는 보수적이고 경쟁력이 취약하다. 필자는 일본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일본 경제가 잠깐 화려했다가 바로 장기 위축의 길을 가고 있는 것도 독일에 비해 이 네 가지 병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한다. 일본인의 역사 왜곡을 볼 때 정직성은 한계가 있고 사회보장제도도 유럽에 비해 훨씬 못 미치고 부동산거품은 한 때 세계에서 가장 심한 나라였다. 한국은 일본보다도 더 네 가지 병기를 갖추지 못한 것 같다. 일본 경제는 잠깐이라도 꽃을 피워봤지만 한국 경제는 잘못하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사그러들지도 모른다. 제2장 유럽의 일상 생활 1. 시민의 감시와 고발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의 국민은 거의 대부분 정직하다. 유럽의 다른 선진국이나 미국도 비슷한 것 같다. 어쩌면 국민의 정직성이 선진국이 되기 위한 필수요건일지 모른다. 이들 국민의 정직성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정직하다기 보다는 교육, 보상체계, 역사, 문화, 정치행태 등이 복합되어 나타난 사후적 결과물로 보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국민은 영원히 정직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중 유럽에서 시민의 감시와 간섭, 고발이 일상화되어 있고 이것이 유럽 사람들을 정직하게 사는 것이 유리하게 만들고 정직할 수 밖에 없게 하는 것 같다. 독일에서 차를 주차해놓고 한참 일을 보고 돌아왔을 때 차가 파손되어 있으면 차에 쪽지가 두 장이 붙어있다는 말이 있다. 하나는 “내가 당신차를 부딪쳤는데 시간이 없어 많이 못 기다리고 간다. 이 전화번호로 연락하면 보험처리 등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내용이고, 또 다른 한 장은 “내가 당신 차를 어떤 차가 박고 가는 것을 보았다. 누군지 찾지 못하면 이 전화번호로 연락해라. 내가 알려 주겠다”는 내용이란다. 실제 이와 유사한 사례를 독일이 아닌 벨기에에서 직접 겪었다. 집사람이 대형 할인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쇼핑 후 나와 보니깐 차의 한 쪽이 심하게 긁혀있었다. 집사람이 당황해하고 있을 때 어떤 벨기에 신사가 다가와 배달트럭이 후진하면서 당신 차를 박은 것을 보았는데 트럭이 그냥 갔다는 것이다. 같이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면 바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럭번호판을 못보았지만 트럭에 써놓은 회사명과 차 색깔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경찰 신고후 사고차량을 바로 찾고 보험처리를 할 수 있었다. 트럭 운전기사는 사고 낸 것을 몰라서 그랬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입증 못하면 형사처벌을 받는다고 들었다. 벨기에 국민의 감시와 신고 정신의 덕을 제대로 본 사례이다. 유럽 사람들의 감시는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모습이다. 독일에서 또 다른 사례가 있었다. 집에 손님이 와 한 달 정도 머문 경우가 있었는데 손님이 사워한 후 2층 화장실 창문을 열어놓고 외출했다. 저녁에 집으로 들어오니 옆집 할아버지가 와서 당신 집은 차고로 해서 2층에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2층 창문도 열어놓고 나가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린 창문으로 누가 들어가는지 하루종일 감시하느라고 힘들었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창문이 열려있을 때 도둑이 들어오면 보험처리도 안된다고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다. 외출시 1층 창문은 완전히 닫아야 되고, 환기를 위해서 2층 창문을 열어놓고 나갈 때는 윗부분만 조금 열리는 1단 열림 장치를 사용하란다. 다음으로 감시는 다른 사람이나 이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간섭 또는 지적으로도 나타난다. 공동주택의 소음, 집 앞의 눈이나 낙엽을 치우지 않는 것과 같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바로 지적한다. 독일에 가서 얼마되지 않은 가을에 집 앞길에 낙엽이 조금 쌓여있었고 필자 생각엔 길에 낙엽이 있는 것이 보기 좋아 그대로 두었다. 앞의 옆집 할아버지가 와서 날이 좋을 때는 낙엽이 문제없지만 비가 오면 낙엽 때문에 우체부나 방문객이 미끌어질 수 있기 때문에 바로 바로 치우란다. 잘못하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겁(?)까지 주었다. 이 뿐 아니라 정원의 잔디 깎기, 울타리나무 정리, 마당의 쓰레기 방치, 집입구에 꽃화분 놓기 등과 같이 보여 지는 것만 관계될 뿐 이웃에게 실질적인 피해가 없는 것도 간섭한다. 필자가 보기엔 그렇게 보기 싫지 않은데 더 예쁘게 꾸미라고 할 때는 부담도 되고 기분이 나쁘기도 한 경우가 있었다. 이와 같은 감시, 간섭의 기제는 잘 사는 동네가 못 사는 동네보다 훨씬 더 강하게 작용하고 그렇기 때문에 잘 사는 동네가 더 안전하고 더 보기 좋은 이유일지 모른다. 나라별 감시, 간섭 기제는 독일이 가장 강한 것 같고 프랑스가 좀 느슨하고 벨기에가 중간 정도인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프랑스에서 산 곳이 대학 근처 서민임대아파트 단지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딱 맞는 예는 아닐지 몰라도 프랑스에서는 평행 주차시 범퍼로 앞․뒤차를 적당히 밀면서 주차를 하기도 하고 범퍼끼리 조금 부딪치는 것은 양해하는 분위기인데 비해 독일에서는 범퍼가 살짝 닿아 조금만 흠집이 나도 신고대상이다. 독일에서 시민의 감시 고발의 압권은 음주운전에 대한 고발일 것이다. 길에서 운전하다 앞에 가는 차가 차선을 잘 못 지키는 등 음주운전 가능성이 보이면 경찰에 위치와 차량 번호를 신고한다. 또 음식점에서 식사를 끝내고 돌아갈 때 과음한 상태에서 직접 차를 몰고 가면 그 음식점 주인이나 종업원이 “우리 집에서 어떤 손님이 술을 많이 먹고 차를 직접하고 간다, 차번호는 0000이다”라고 신고를 한다. 호텔에서도 비슷하다. 이러한 신고가 한국식당에서는 없어서 인지 모르겠지만 독일 한국식당 근처에는 자주 경찰이 잠복해 있다가 음주 가능성이 있는 차가 있으면 뒤를 따라가 음주단속을 한다. 독일에서 음주 단속에 걸리면 벌금이 많고 운전면허가 정지 또는 취소된다. 벌금도 소득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감시, 간섭에 대한 의무감은 조직 내부의 고발도 당연시한다. 어떤 사회도 공공기관이나 은행, 기업 등의 부정, 부패, 탈세 등의 비리는 검찰, 경찰 등의 수사기관이나 금융감독조직, 세무당국의 힘만으로 근절하는데 한계가 있다. 우리나라는 무소불이의 권력이 있는 검찰과 막강한 정보력의 경찰, 그리고 대단한 힘을 갖고 있는 국세청과 금융감독조직이 있으면서도 기업, 공공기관, 금융기관의 부정과 비리, 탈세가 계속되는 것은 내부고발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다. 2011년~2012년 상호저축은행의 구조조정과정에서 밝혀진 대주주와 경영층의 비리를 볼 때 금융감독당국의 잘못은 당연한 것이지만 검찰과 경찰의 막강한 수사력과 정보력은 언제 어디에 쓰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이다. 부정부패를 줄이고 사회 정의가 바로 서려면 공권력도 제 역할을 해야 하지만 내부고발을 장려하고 내부고발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 <계속>
(성함이나 사진을 클릭하시면 송현경제연구소 싸이트로 이동
http://www.socialdesign.kr/news/articleView.html?idxno=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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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uly 28, 2012
김상조 vs 장하준, 재벌 놓고 재격돌
김상조 교수의 <종횡무진 한국 경제>와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대담을 엮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묘하게 두 책의 출간 시점이 겹치면서 한국 경제에 대한 논쟁 공간이 생겨났다.
이 논쟁에는 전사(前史)가 있다. 2005년 7월, 장하준·정승일·이종태는 대담집 <쾌도난마 한국 경제>를 펴내면서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을 강하게 비판했다. ‘대안연대’ 회원이던 이들은 산업정책을 통해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박정희의 성장 전략을 재평가하며, 경제발전 과정에서 재벌이 기업집단 효과를 살리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김대중 정부 이후 본격화한 주주자본주의에 대해 강한 비판의 칼을 빼들었다. 적대적 인수합병 허용, 소액주주 권리 강화, 출자총액제한제도 강화 등 DJ 정부가 도입한 일련의 조처들이 주주자본주의를 강화했고, 주주들의 단기 이익에 치중하는 주주자본주의 때문에 재투자 메커니즘이 붕괴했다는 것이다.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 또한 주주자본주의의 논리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들은 스웨덴처럼 주주자본주의로부터 재벌의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재벌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자는 ‘사회-재벌 대타협론’을 주장했다. 상당히 논쟁적인 문제 제기였다.2007년 11월, 소액주주운동을 이끌었던 김상조 교수와 유종일 교수, 홍종학 교수 등은 대담집 <한국 경제 새판짜기>(곽정수 <한겨레> 기자 정리)를 펴내면서 이 논리를 재비판했다. 이들은 참여연대와 경실련 등에서 재벌 재혁과 경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개혁적 경제학자이다.
이들은 박정희 정부 시기의 국가주도형 발전 전략이나 재벌 중심의 발전 모델이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재벌의 경제력 집중 현상이 깊어지면서 중소기업의 존립을 위협하고 국민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선순환 구조’를 깨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벌과 중소기업의 하도급 관계를 개선하고, 대기업을 총수의 전횡에서 해방시키는 재벌 개혁 운동 등 ‘경제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재천명한 셈이다. 이들은 ‘사회-재벌 대타협론’에 대해서도 8%대에 불과한 낮은 노조 조직률 등 한국이 처한 상황이 스웨덴과는 너무 다르고, 사회와 재벌이 타협하게 할 현실적 방법을 찾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이번에 새로 나온 두 책에서도 여전하다. 대선을 앞둔 2012년, 재벌 개혁과 경제 민주화는 다시 정치권의 화두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라는 유력 대선주자와 얽히면서 박정희식 성장 전략에 대한 평가 또한 여전히 뜨거운 쟁점으로 남아 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이 두 책에 대한 비판적 리뷰를 보내왔다. 재벌 개혁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펴는 정승일 박사와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의 견해도 들어보았다.
원래 예전에는 한국 경제에 대한 진보 진영의 비판과 담론이 현존 ‘발전 모델’의 성격이 무엇이며, 어떤 발전 모델로 대체해야 하느냐, 즉 오늘날의 안목으로 보면 정치·경제 모델 차원에서의 분석과 대안을 논하는 아주 거시적인 것이었다.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이 그러했으며 1980년대의 ‘사회성격 논쟁’이 그러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진영의 소멸과 더불어 그러한 ‘비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기대와 신념이 무너지고 오히려 ‘종속과 매판으로 점철되었다’고 비판했던 한국 경제가 세계 경제의 ‘용’으로 추앙받게 된 1990년대에 들어서 이러한 큰 틀의 경제 담론은 사라졌으며, 그와 함께 ‘한국경제론’도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그 뒤로도 여러 정책과 문제 영역에서 뜨거운 토론이 없지 않았으나, 좀 더 거시적인 경제 모델의 차원으로 가면 그 내용도 실로 모호하고 숱한 오해만 양산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말로 적당히 때우고 넘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이제 다시 총체적·거시적 차원에서 한국의 정치·경제 모델에 대한 논의가 부활하고 있다. 먼저 2008년에 전면화한 지구적 자본주의의 위기는 지난 30년간 부동의 규범이요 과학처럼 군림하던 금융자본주의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실패한 모델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했다. 이와 함께 자산시장과 소비시장을 지배하던 낙관주의가 정반대로 선회하면서 그동안 무시되어온 각종 사회경제적 모순과 갈등의 쟁점이 전면화해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만성적 실업, 양극화, 가계 부채, 재벌의 전횡, 복지 요구 등이 순식간에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제 정책 차원만으로 풀 수 있는 개별 사안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주의라는 전체 구조의 동일한 뿌리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므로 그 구조 전체를 새로운 조직 및 운영 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경제 모델로 전환하는, 더 큰 차원에서의구조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김상조 교수의 신간 <종횡무진 한국 경제:재벌과 모피아의 함정에서 탈출하라>와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신간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모두 이런 담론의 전환점에 중요한 이정표로서 주목해야 할 책들이다. 두 책의 저자들은 이미 강력한 자기주장으로 한국 경제에 대한 비판 제언을 던져 그 주장의 선명성 때문에 부당한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현실 참여에도 헌신해왔다. 더욱이 그들이 때로는 암묵적, 때로는 명시적으로 서로를 논적으로 삼아왔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 두 저서는 다루는 내용과 규모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깊은 내공을 가진 저자들의 오랜 고민과 사유가 체현되어 있어서 간단하게 정리하고 평하는 짓을 불허한다. 하지만 서두에 이야기한 대로 대한민국 정치·경제 모델의 선택이라는 화두에서 이 책들을 조망해보기에 좋은 개념이 있으니 거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정치·경제 모델과 ‘상보성’의 개념
이미 1960년대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최소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 자본주의는 조직 원리에서나 제도적 형태에서나 전혀 획일적이지 않고 나라마다 각각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어떨 때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개별의 영역과 제도적 장치가 천차만별로 모두 다르다는 논의에 머물기도 했지만, 지난 10년간 그러한 각국의 경제 모델 다양성을 규명하는 핵심 개념의 하나로서 ‘상보성(comple- mentarity)’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예를 들어 고용과 해고가 비교적 자유로운 영국이나 미국식 고용 관행은 종신고용과 연공서열까지 주어져 있던 1990년대 이전의 일본 대기업식 고용 관행과 차이가 있지만, 이는 단순히 산업 관계에서의 차원만으로 그 가치와 기능성을 비교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기업 전략에서 생산성과 노동 숙련, 조직적 단결 따위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고, 나아가 심지어 기업금융이 직접금융이냐 간접금융이냐, 정부의 산업정책과 지원은 어떠하냐 등의 문제까지 모조리 연결되게 되어 있다. 즉, 제도와 그 영역은 어느 하나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전체 제도의 망들 속의 통합적 일부(integral part)로 존재하고 기능하는 것이기에, 어떤 한 제도에 대한 평가는 결국 그 나라의 정치·경제 모델 전체를 관통하는 제도 간 상보성의 맥락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현존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곳곳에는 가지가지 문제와 모순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이러한 문제와 모순들에 대한 해법을 협소한 개별 사안 차원 내부의 합리성에서만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가고 있다. 과연 현재 한국 자본주의의 여러 제도 사이에 상보성은 존재하는가? 혹시 선진국이네, 글로벌 스탠더드네 하면서 이런저런 제도와 관행을 베껴오다가 되레 있던 상보성마저 파괴된 상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다시 정책과 제도들끼리 상보성을 갖도록(일본어 냄새 나는 속어를 용서하신다면 그야말로 ‘아다리가 서로 맞도록’) 하자면 어떠한 조직 및 운영 원리를 가진 정치·경제 모델을 건설해나가야 할까?
김상조의 선택은 ‘구자유주의’?
김상조 교수는 그를 비난하는 진영에서 “진보의 탈을 쓴 신자유주의자”라는 악평까지 듣는 경우가 있으나 그의 저서를 읽어보면 그러한 단순화된 악평은 실로 부당한 캐리커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단순히 어떤 이념적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똑같은 문제를 던져 똑같은 해답을 계속 반복하는 진짜 신자유주의의 교조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어디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생각하고 손대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등을 밝혀나가는 그의 논리는 정직하고 성실하다. 진보 진영 논객이나 학자들이 흔히 빠지곤 하는 결함, 즉 미리 정해져 있는 논리와 주장의 틀을 그대로 활용하는 손쉽지만 무책임한 모습을 이 두꺼운 책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책 전체를 통틀어 세세한 데이터와 각 영역의 각론에 천착해가는 과정에서 김상조 교수가 끊임없이 고민을 집중하는 지점은 바로 “어떻게 여러 제도와 영역들 사이에 통일적인 조직 및 운영 원리를 갖춘 상호 보완성을 부여할 것인가”이다. 예를 들어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김상조 교수는 재벌 개혁의 방향 또한 단순히 주주 권리의 강화만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한국 특유의 여러 법적·제도적 환경 안에서 실제로 재벌의 전횡을 효과적으로 막고 경제 효율성을 꾀할 수 있는 제도를 찾기 위해 다양한 관점과 시점에서의 토론에 해답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그가 그러한 상보성을 담지한 정치·경제 모델의 원리로 제시하는 것은? 그 자신의 표현으로 법과 제도의 질서가 확립되어 있는 ‘구자유주의’라고 한다. 이 부분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스미스, 밀, 마셜에 이르는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사상은 만물 만사, 심지어는 극도의 사회적 갈등까지도 모두 상보적 관계로 엮인 경제 질서를 제시해 그려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인간 세상 어디에도 존재한 적이 없는 세계, 폴라니의 표현으로 그야말로 ‘적나라한 유토피아’이다. 110년 전 베블런이, 그리고 80년 전 뮈르달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그 세계는 18세기 유럽인들이 가상으로 그려낸 ‘자연법’의 세계일 뿐이다. 영국에서나 미국에서나 19세기 이래 실제로 존재했던 자본주의는 그러한 ‘구자유주의’의 허울을 내걸고 실제로는 온갖 탈법·불법·폭력을 구사하며 오로지 ‘비즈니스’에 골몰했던 공장주들과 로스차일드 가문, 그리고 미국의 ‘날강도 귀족들(robber barons)’이 날뛰던 세계였다.
김상조 교수가 희구하는 ‘최소한의 법과 제도의 질서가 자리 잡고 공정·공평의 경쟁이 가능한 자본주의’는 사실상 1930년대 이후 뉴딜 등 규제된 자본주의의 시대에 등장한 것이었다. 요컨대 여러 경제제도가 안착되어 서로 간의 상보성을 발휘해 하나의 조화와 질서를 이루는 경제 모델은 ‘구자유주의’가 우상으로 내건 ‘자유시장’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규제하고 조정하는 가운데서 출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도 간의 상호 보완성을 내장한 바람직한 정치·경제 모델의 모색 또한 낡은 19세기 그림책에나 나오는 ‘구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연모가 아닌,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현실에 들어맞으면서 실제로 구현이 가능한, 모종의 ‘잠정적 유토피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책은 흔히 널려 있는 ‘신자유주의’ 비판과 확연히 구별되는 장점이 있다. 신자유주의란 실제로는 자본 및 금융시장을 통한 소수의 자본 축적 프로젝트인 금융자본주의일 뿐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요컨대 ‘글로벌 스탠더드’처럼 통하는 수많은 교조와 교리가 기실 금융자본주의라는 일개 경제 모델의 운영 원리에 불과하며, 또 그 모델의 많은 제도들은 다 금융자본 세력의 축적이라는 목적에 복무한다는 상보성을 갖는다는 점을 일관되게 폭로하고 있다. 그래서 ‘쾌도난마’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세 사람의 진술은 거침없고 그러면서도 분명한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정승일은 자신들 논의로부터 함의를 극도로 뽑아내어 현실에 대해 공격적이라 할 만큼 명쾌하고 분명한 판단과 제안을 내놓고 있지만 곱씹어보면 다시 또 생각하게 만드는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특히 보수가 아닌 진보 측의 경제 담론에 깊이 파고들어 있는 여러 화두와 의제가 사실상 이러한 금융자본주의 경제 모델의 연장이요 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많은 논의를 할애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진보 진영에서 보통 ‘절대악’으로 인식되는 박정희식 국가 주도 산업정책의 발전 모델과 재벌 체제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들 또한 박정희 체제를 찬양하고 재벌 일가의 소유권을 비호하는 주장을 편다는 악선전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이 또한 오해일 뿐이다. 이들이 내걸고 있는 태도는 경제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자유주의건 마르크스주의건 그 모든 이념과 도그마의 선입견을 벗어나고자 하는, 굳이 이름 붙이자면 ‘경제적 현실주의’라고 할 만한 것이다. 금융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여러 제도 간의 상보성을 담보할 수 있는 대안적인 조직 및 운영 원리를 찾는다는 관점에서 지금까지 금융자본주의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부당하게 왜곡 폄하된 국가 주도 산업정책이나 기업집단 체제의 역할과 의의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온당한 주장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빠져 있다는 공허감을 느낀 이 또한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20세기 각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험을 볼 때, 상보성을 담지한 일관된 정치·경제 모델을 건설하는 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첫째는 기술 발전과 산업구조의 변화를 어떻게 최대한 선도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할 것인가, 둘째는 그러한 각 제도 간에 상보적인 조정을 부여할 수 있게 만드는 가치와 이념은 무엇이고 이에 대한 다수 국민의 합의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동원해낼 것인가이다. 분명히 지금 우리가 사는 2012년은 1970년대와는 도저히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상전벽해 같은 기술 발전과 산업구조 변화를 겪고 있는 시기이다. 동시에 금융자본주의라는 기존 정치·경제 모델의 가치관과 이념은 결정적 타격을 받았지만, 수익성과 자본가치 극대화라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경제의 조직 및 운영 원리가 명확히 나타난 것도 아니요, 그것이 다수 대중의 민주적 합의를 얻어내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장하준식 주장의 공허함
이들은 제조업 폄하와 탈산업 담론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한국의 1970년대 ‘캐치업’식 경제성장이나 1980년대 말 ‘포디즘’식 경제성장 모델이 지금도 가능하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적극적 산업정책이라고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분명히 변화된 기술적·산업적 발전에 걸맞은 형태로 제시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대안적 모델을 건설하는 일은 그것에 이해관계를 갖는 다양한 사회 세력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포섭해 동의시켜낼 것인가를 모색하는, 즉 ‘역사적 블록’을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의 이익을 새로운 경제 모델의 작동 원리와 어떻게 조응시킬 것인지에 대한 논의 또한 이 책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이 책이 이러한 문제까지 포괄해 대안적 경제 모델의 얼개를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논의가 빠져 있는 상태에서 박정희 모델과 재벌 체제에 대한 재평가의 논의만 나오는 형국인지라, 신자유주의 이전의 모델을 다시 요구하는 시대착오라는 오해, 그리고 사실상 국가 관료들과 재벌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냐는 오해까지 빚어내는 촌극이 벌어질 여지는 피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필자의 안목으로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주의의 여러 문제에 짓눌려 있는 대한민국 경제에 활로를 틔우기 위해서는, 단순히 이런저런 새로운 정책과 새로운 제도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여러 정책과 제도들에 상보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일관된 조직 및 운영 원리를 담지한 새로운 정치·경제 모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진보 진영 전체에 확산되어간다고 보인다. 그동안 상호 평행선 혹은 대극의 처지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지던 두 책의 저자들이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만은 동의의 기반이 생겨나고 있다고 보인다. 구체적 각론에서의 차이점들은 물론 크고도 깊은 것이지만, 이제 바야흐로 “한국 정치·경제 모델의 얼개를 새로 짜나가자”라는 큰 질문이 모두의 화두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중차대한 진전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진보 진영은 신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수세적 비판이 아니라 대안적 모델의 구상이라는 능동적·창조적 태도로 전환해가고 있다.
이 논쟁에는 전사(前史)가 있다. 2005년 7월, 장하준·정승일·이종태는 대담집 <쾌도난마 한국 경제>를 펴내면서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을 강하게 비판했다. ‘대안연대’ 회원이던 이들은 산업정책을 통해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박정희의 성장 전략을 재평가하며, 경제발전 과정에서 재벌이 기업집단 효과를 살리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김대중 정부 이후 본격화한 주주자본주의에 대해 강한 비판의 칼을 빼들었다. 적대적 인수합병 허용, 소액주주 권리 강화, 출자총액제한제도 강화 등 DJ 정부가 도입한 일련의 조처들이 주주자본주의를 강화했고, 주주들의 단기 이익에 치중하는 주주자본주의 때문에 재투자 메커니즘이 붕괴했다는 것이다.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 또한 주주자본주의의 논리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들은 스웨덴처럼 주주자본주의로부터 재벌의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재벌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자는 ‘사회-재벌 대타협론’을 주장했다. 상당히 논쟁적인 문제 제기였다.2007년 11월, 소액주주운동을 이끌었던 김상조 교수와 유종일 교수, 홍종학 교수 등은 대담집 <한국 경제 새판짜기>(곽정수 <한겨레> 기자 정리)를 펴내면서 이 논리를 재비판했다. 이들은 참여연대와 경실련 등에서 재벌 재혁과 경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개혁적 경제학자이다.
이들은 박정희 정부 시기의 국가주도형 발전 전략이나 재벌 중심의 발전 모델이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재벌의 경제력 집중 현상이 깊어지면서 중소기업의 존립을 위협하고 국민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선순환 구조’를 깨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벌과 중소기업의 하도급 관계를 개선하고, 대기업을 총수의 전횡에서 해방시키는 재벌 개혁 운동 등 ‘경제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재천명한 셈이다. 이들은 ‘사회-재벌 대타협론’에 대해서도 8%대에 불과한 낮은 노조 조직률 등 한국이 처한 상황이 스웨덴과는 너무 다르고, 사회와 재벌이 타협하게 할 현실적 방법을 찾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이번에 새로 나온 두 책에서도 여전하다. 대선을 앞둔 2012년, 재벌 개혁과 경제 민주화는 다시 정치권의 화두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라는 유력 대선주자와 얽히면서 박정희식 성장 전략에 대한 평가 또한 여전히 뜨거운 쟁점으로 남아 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이 두 책에 대한 비판적 리뷰를 보내왔다. 재벌 개혁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펴는 정승일 박사와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의 견해도 들어보았다.
원래 예전에는 한국 경제에 대한 진보 진영의 비판과 담론이 현존 ‘발전 모델’의 성격이 무엇이며, 어떤 발전 모델로 대체해야 하느냐, 즉 오늘날의 안목으로 보면 정치·경제 모델 차원에서의 분석과 대안을 논하는 아주 거시적인 것이었다.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이 그러했으며 1980년대의 ‘사회성격 논쟁’이 그러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진영의 소멸과 더불어 그러한 ‘비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기대와 신념이 무너지고 오히려 ‘종속과 매판으로 점철되었다’고 비판했던 한국 경제가 세계 경제의 ‘용’으로 추앙받게 된 1990년대에 들어서 이러한 큰 틀의 경제 담론은 사라졌으며, 그와 함께 ‘한국경제론’도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그 뒤로도 여러 정책과 문제 영역에서 뜨거운 토론이 없지 않았으나, 좀 더 거시적인 경제 모델의 차원으로 가면 그 내용도 실로 모호하고 숱한 오해만 양산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말로 적당히 때우고 넘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이제 다시 총체적·거시적 차원에서 한국의 정치·경제 모델에 대한 논의가 부활하고 있다. 먼저 2008년에 전면화한 지구적 자본주의의 위기는 지난 30년간 부동의 규범이요 과학처럼 군림하던 금융자본주의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실패한 모델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했다. 이와 함께 자산시장과 소비시장을 지배하던 낙관주의가 정반대로 선회하면서 그동안 무시되어온 각종 사회경제적 모순과 갈등의 쟁점이 전면화해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만성적 실업, 양극화, 가계 부채, 재벌의 전횡, 복지 요구 등이 순식간에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제 정책 차원만으로 풀 수 있는 개별 사안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주의라는 전체 구조의 동일한 뿌리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므로 그 구조 전체를 새로운 조직 및 운영 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경제 모델로 전환하는, 더 큰 차원에서의구조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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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자료
김상조 교수(왼쪽)는 세세한 데이터를 통해 재벌의 전횡을 막고 경제 효율성을 꾀할 수 있는 제도를 찾아나간다. 장하준 교수(오른쪽)는 금융자본주의의 도그마를 통렬히 비판하고 국가 주도 산업정책 등 폄하돼온 정책을 재평가한다. |
김상조 교수의 신간 <종횡무진 한국 경제:재벌과 모피아의 함정에서 탈출하라>와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신간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모두 이런 담론의 전환점에 중요한 이정표로서 주목해야 할 책들이다. 두 책의 저자들은 이미 강력한 자기주장으로 한국 경제에 대한 비판 제언을 던져 그 주장의 선명성 때문에 부당한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현실 참여에도 헌신해왔다. 더욱이 그들이 때로는 암묵적, 때로는 명시적으로 서로를 논적으로 삼아왔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 두 저서는 다루는 내용과 규모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깊은 내공을 가진 저자들의 오랜 고민과 사유가 체현되어 있어서 간단하게 정리하고 평하는 짓을 불허한다. 하지만 서두에 이야기한 대로 대한민국 정치·경제 모델의 선택이라는 화두에서 이 책들을 조망해보기에 좋은 개념이 있으니 거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정치·경제 모델과 ‘상보성’의 개념
이미 1960년대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최소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 자본주의는 조직 원리에서나 제도적 형태에서나 전혀 획일적이지 않고 나라마다 각각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어떨 때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개별의 영역과 제도적 장치가 천차만별로 모두 다르다는 논의에 머물기도 했지만, 지난 10년간 그러한 각국의 경제 모델 다양성을 규명하는 핵심 개념의 하나로서 ‘상보성(comple- mentarity)’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예를 들어 고용과 해고가 비교적 자유로운 영국이나 미국식 고용 관행은 종신고용과 연공서열까지 주어져 있던 1990년대 이전의 일본 대기업식 고용 관행과 차이가 있지만, 이는 단순히 산업 관계에서의 차원만으로 그 가치와 기능성을 비교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기업 전략에서 생산성과 노동 숙련, 조직적 단결 따위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고, 나아가 심지어 기업금융이 직접금융이냐 간접금융이냐, 정부의 산업정책과 지원은 어떠하냐 등의 문제까지 모조리 연결되게 되어 있다. 즉, 제도와 그 영역은 어느 하나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전체 제도의 망들 속의 통합적 일부(integral part)로 존재하고 기능하는 것이기에, 어떤 한 제도에 대한 평가는 결국 그 나라의 정치·경제 모델 전체를 관통하는 제도 간 상보성의 맥락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현존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곳곳에는 가지가지 문제와 모순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이러한 문제와 모순들에 대한 해법을 협소한 개별 사안 차원 내부의 합리성에서만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가고 있다. 과연 현재 한국 자본주의의 여러 제도 사이에 상보성은 존재하는가? 혹시 선진국이네, 글로벌 스탠더드네 하면서 이런저런 제도와 관행을 베껴오다가 되레 있던 상보성마저 파괴된 상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다시 정책과 제도들끼리 상보성을 갖도록(일본어 냄새 나는 속어를 용서하신다면 그야말로 ‘아다리가 서로 맞도록’) 하자면 어떠한 조직 및 운영 원리를 가진 정치·경제 모델을 건설해나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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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 경제 |
김상조 교수는 그를 비난하는 진영에서 “진보의 탈을 쓴 신자유주의자”라는 악평까지 듣는 경우가 있으나 그의 저서를 읽어보면 그러한 단순화된 악평은 실로 부당한 캐리커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단순히 어떤 이념적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똑같은 문제를 던져 똑같은 해답을 계속 반복하는 진짜 신자유주의의 교조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어디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생각하고 손대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등을 밝혀나가는 그의 논리는 정직하고 성실하다. 진보 진영 논객이나 학자들이 흔히 빠지곤 하는 결함, 즉 미리 정해져 있는 논리와 주장의 틀을 그대로 활용하는 손쉽지만 무책임한 모습을 이 두꺼운 책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책 전체를 통틀어 세세한 데이터와 각 영역의 각론에 천착해가는 과정에서 김상조 교수가 끊임없이 고민을 집중하는 지점은 바로 “어떻게 여러 제도와 영역들 사이에 통일적인 조직 및 운영 원리를 갖춘 상호 보완성을 부여할 것인가”이다. 예를 들어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김상조 교수는 재벌 개혁의 방향 또한 단순히 주주 권리의 강화만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한국 특유의 여러 법적·제도적 환경 안에서 실제로 재벌의 전횡을 효과적으로 막고 경제 효율성을 꾀할 수 있는 제도를 찾기 위해 다양한 관점과 시점에서의 토론에 해답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그가 그러한 상보성을 담지한 정치·경제 모델의 원리로 제시하는 것은? 그 자신의 표현으로 법과 제도의 질서가 확립되어 있는 ‘구자유주의’라고 한다. 이 부분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스미스, 밀, 마셜에 이르는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사상은 만물 만사, 심지어는 극도의 사회적 갈등까지도 모두 상보적 관계로 엮인 경제 질서를 제시해 그려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인간 세상 어디에도 존재한 적이 없는 세계, 폴라니의 표현으로 그야말로 ‘적나라한 유토피아’이다. 110년 전 베블런이, 그리고 80년 전 뮈르달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그 세계는 18세기 유럽인들이 가상으로 그려낸 ‘자연법’의 세계일 뿐이다. 영국에서나 미국에서나 19세기 이래 실제로 존재했던 자본주의는 그러한 ‘구자유주의’의 허울을 내걸고 실제로는 온갖 탈법·불법·폭력을 구사하며 오로지 ‘비즈니스’에 골몰했던 공장주들과 로스차일드 가문, 그리고 미국의 ‘날강도 귀족들(robber barons)’이 날뛰던 세계였다.
김상조 교수가 희구하는 ‘최소한의 법과 제도의 질서가 자리 잡고 공정·공평의 경쟁이 가능한 자본주의’는 사실상 1930년대 이후 뉴딜 등 규제된 자본주의의 시대에 등장한 것이었다. 요컨대 여러 경제제도가 안착되어 서로 간의 상보성을 발휘해 하나의 조화와 질서를 이루는 경제 모델은 ‘구자유주의’가 우상으로 내건 ‘자유시장’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규제하고 조정하는 가운데서 출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도 간의 상호 보완성을 내장한 바람직한 정치·경제 모델의 모색 또한 낡은 19세기 그림책에나 나오는 ‘구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연모가 아닌,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현실에 들어맞으면서 실제로 구현이 가능한, 모종의 ‘잠정적 유토피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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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2008년 삼성그룹 경영쇄신안을 발표하는 이건희 회장. 재벌 개혁은 한국 경제의 ‘뜨거운 감자’다. |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책은 흔히 널려 있는 ‘신자유주의’ 비판과 확연히 구별되는 장점이 있다. 신자유주의란 실제로는 자본 및 금융시장을 통한 소수의 자본 축적 프로젝트인 금융자본주의일 뿐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요컨대 ‘글로벌 스탠더드’처럼 통하는 수많은 교조와 교리가 기실 금융자본주의라는 일개 경제 모델의 운영 원리에 불과하며, 또 그 모델의 많은 제도들은 다 금융자본 세력의 축적이라는 목적에 복무한다는 상보성을 갖는다는 점을 일관되게 폭로하고 있다. 그래서 ‘쾌도난마’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세 사람의 진술은 거침없고 그러면서도 분명한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정승일은 자신들 논의로부터 함의를 극도로 뽑아내어 현실에 대해 공격적이라 할 만큼 명쾌하고 분명한 판단과 제안을 내놓고 있지만 곱씹어보면 다시 또 생각하게 만드는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특히 보수가 아닌 진보 측의 경제 담론에 깊이 파고들어 있는 여러 화두와 의제가 사실상 이러한 금융자본주의 경제 모델의 연장이요 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많은 논의를 할애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진보 진영에서 보통 ‘절대악’으로 인식되는 박정희식 국가 주도 산업정책의 발전 모델과 재벌 체제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들 또한 박정희 체제를 찬양하고 재벌 일가의 소유권을 비호하는 주장을 편다는 악선전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이 또한 오해일 뿐이다. 이들이 내걸고 있는 태도는 경제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자유주의건 마르크스주의건 그 모든 이념과 도그마의 선입견을 벗어나고자 하는, 굳이 이름 붙이자면 ‘경제적 현실주의’라고 할 만한 것이다. 금융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여러 제도 간의 상보성을 담보할 수 있는 대안적인 조직 및 운영 원리를 찾는다는 관점에서 지금까지 금융자본주의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부당하게 왜곡 폄하된 국가 주도 산업정책이나 기업집단 체제의 역할과 의의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온당한 주장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빠져 있다는 공허감을 느낀 이 또한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20세기 각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험을 볼 때, 상보성을 담지한 일관된 정치·경제 모델을 건설하는 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첫째는 기술 발전과 산업구조의 변화를 어떻게 최대한 선도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할 것인가, 둘째는 그러한 각 제도 간에 상보적인 조정을 부여할 수 있게 만드는 가치와 이념은 무엇이고 이에 대한 다수 국민의 합의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동원해낼 것인가이다. 분명히 지금 우리가 사는 2012년은 1970년대와는 도저히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상전벽해 같은 기술 발전과 산업구조 변화를 겪고 있는 시기이다. 동시에 금융자본주의라는 기존 정치·경제 모델의 가치관과 이념은 결정적 타격을 받았지만, 수익성과 자본가치 극대화라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경제의 조직 및 운영 원리가 명확히 나타난 것도 아니요, 그것이 다수 대중의 민주적 합의를 얻어내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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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제조업 폄하와 탈산업 담론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한국의 1970년대 ‘캐치업’식 경제성장이나 1980년대 말 ‘포디즘’식 경제성장 모델이 지금도 가능하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적극적 산업정책이라고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분명히 변화된 기술적·산업적 발전에 걸맞은 형태로 제시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대안적 모델을 건설하는 일은 그것에 이해관계를 갖는 다양한 사회 세력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포섭해 동의시켜낼 것인가를 모색하는, 즉 ‘역사적 블록’을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의 이익을 새로운 경제 모델의 작동 원리와 어떻게 조응시킬 것인지에 대한 논의 또한 이 책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이 책이 이러한 문제까지 포괄해 대안적 경제 모델의 얼개를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논의가 빠져 있는 상태에서 박정희 모델과 재벌 체제에 대한 재평가의 논의만 나오는 형국인지라, 신자유주의 이전의 모델을 다시 요구하는 시대착오라는 오해, 그리고 사실상 국가 관료들과 재벌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냐는 오해까지 빚어내는 촌극이 벌어질 여지는 피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필자의 안목으로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주의의 여러 문제에 짓눌려 있는 대한민국 경제에 활로를 틔우기 위해서는, 단순히 이런저런 새로운 정책과 새로운 제도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여러 정책과 제도들에 상보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일관된 조직 및 운영 원리를 담지한 새로운 정치·경제 모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진보 진영 전체에 확산되어간다고 보인다. 그동안 상호 평행선 혹은 대극의 처지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지던 두 책의 저자들이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만은 동의의 기반이 생겨나고 있다고 보인다. 구체적 각론에서의 차이점들은 물론 크고도 깊은 것이지만, 이제 바야흐로 “한국 정치·경제 모델의 얼개를 새로 짜나가자”라는 큰 질문이 모두의 화두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중차대한 진전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진보 진영은 신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수세적 비판이 아니라 대안적 모델의 구상이라는 능동적·창조적 태도로 전환해가고 있다.
Sunday, February 5, 2012
시험치는게 걍 공부하는 것보다
http://www.nytimes.com/2011/01/21/science/21memory.html?pagewanted=1&_r=1
더 효과적이라는 NYT 기사
예전부터 느낀거지만
셤치고
딸딸 외우고
등의 고전 방법이 학습에는 최상인듯
더 효과적이라는 NYT 기사
예전부터 느낀거지만
셤치고
딸딸 외우고
등의 고전 방법이 학습에는 최상인듯
Thursday, February 2, 2012
영역싸움?
생각해보면 J Haidt, Jesse Graham, Pete Ditto, Brian Nosek, 류의 moral foundation연구하는 사람들과 (mapping morality)
John Jost류의 system justification연구하는 사람들, 혹은 다른 심리학자들 간에 tension이 있는가?
http://chronicle.com/article/Jonathan-Haidt-Decodes-the/130453/
두고두고 읽어볼만한 article
(여기에서 Jost가 Haidt를 비판적으로 얘기함. Jost의 Annual Review of Psych paper에도 Hadit가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음...사실 그 페이퍼를 보면 너무 일방적으로 Jost 자신(류)의 페이퍼들만 인용함.
물론 Haidt가 확 뜨기 전(??)이라 그럴수도 있지만?)
I may be wrong, but it looks like there's some slight tension between the 'moral foundation' group (e.g,. Haidt, Graham, Ditto, etc.)
and the system justification theory group (e.g., Jost, Kay, etc.). The former regards the five 'moral' foundations as the building blocks and the latter looks at a few kinds of 'motivational' goals to understand attitudes and orientation and so forth.
Never realized before that the two views might not be able to get along with each other very well.
John Jost류의 system justification연구하는 사람들, 혹은 다른 심리학자들 간에 tension이 있는가?
http://chronicle.com/article/Jonathan-Haidt-Decodes-the/130453/
두고두고 읽어볼만한 article
(여기에서 Jost가 Haidt를 비판적으로 얘기함. Jost의 Annual Review of Psych paper에도 Hadit가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음...사실 그 페이퍼를 보면 너무 일방적으로 Jost 자신(류)의 페이퍼들만 인용함.
물론 Haidt가 확 뜨기 전(??)이라 그럴수도 있지만?)
I may be wrong, but it looks like there's some slight tension between the 'moral foundation' group (e.g,. Haidt, Graham, Ditto, etc.)
and the system justification theory group (e.g., Jost, Kay, etc.). The former regards the five 'moral' foundations as the building blocks and the latter looks at a few kinds of 'motivational' goals to understand attitudes and orientation and so forth.
Never realized before that the two views might not be able to get along with each other very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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