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ly 28, 2012

김상조 vs 장하준, 재벌 놓고 재격돌

김상조 교수의 <종횡무진 한국 경제>와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대담을 엮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묘하게 두 책의 출간 시점이 겹치면서 한국 경제에 대한 논쟁 공간이 생겨났다.

이 논쟁에는 전사(前史)가 있다. 2005년 7월, 장하준·정승일·이종태는 대담집 <쾌도난마 한국 경제>를 펴내면서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을 강하게 비판했다. ‘대안연대’ 회원이던 이들은 산업정책을 통해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박정희의 성장 전략을 재평가하며, 경제발전 과정에서 재벌이 기업집단 효과를 살리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김대중 정부 이후 본격화한 주주자본주의에 대해 강한 비판의 칼을 빼들었다. 적대적 인수합병 허용, 소액주주 권리 강화, 출자총액제한제도 강화 등 DJ 정부가 도입한 일련의 조처들이 주주자본주의를 강화했고, 주주들의 단기 이익에 치중하는 주주자본주의 때문에 재투자 메커니즘이 붕괴했다는 것이다.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 또한 주주자본주의의 논리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들은 스웨덴처럼 주주자본주의로부터 재벌의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재벌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자는 ‘사회-재벌 대타협론’을 주장했다. 상당히 논쟁적인 문제 제기였다.
2007년 11월, 소액주주운동을 이끌었던 김상조 교수와 유종일 교수, 홍종학 교수 등은 대담집 <한국 경제 새판짜기>(곽정수 <한겨레> 기자 정리)를 펴내면서 이 논리를 재비판했다. 이들은 참여연대와 경실련 등에서 재벌 재혁과 경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개혁적 경제학자이다.

이들은 박정희 정부 시기의 국가주도형 발전 전략이나 재벌 중심의 발전 모델이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재벌의 경제력 집중 현상이 깊어지면서 중소기업의 존립을 위협하고 국민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선순환 구조’를 깨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벌과 중소기업의 하도급 관계를 개선하고, 대기업을 총수의 전횡에서 해방시키는 재벌 개혁 운동 등 ‘경제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재천명한 셈이다. 이들은 ‘사회-재벌 대타협론’에 대해서도 8%대에 불과한 낮은 노조 조직률 등 한국이 처한 상황이 스웨덴과는 너무 다르고, 사회와 재벌이 타협하게 할 현실적 방법을 찾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이번에 새로 나온 두 책에서도 여전하다. 대선을 앞둔 2012년, 재벌 개혁과 경제 민주화는 다시 정치권의 화두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라는 유력 대선주자와 얽히면서 박정희식 성장 전략에 대한 평가 또한 여전히 뜨거운 쟁점으로 남아 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이 두 책에 대한 비판적 리뷰를 보내왔다. 재벌 개혁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펴는 정승일 박사와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의 견해도 들어보았다. 

원래 예전에는 한국 경제에 대한 진보 진영의 비판과 담론이 현존 ‘발전 모델’의 성격이 무엇이며, 어떤 발전 모델로 대체해야 하느냐, 즉 오늘날의 안목으로 보면 정치·경제 모델 차원에서의 분석과 대안을 논하는 아주 거시적인 것이었다.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이 그러했으며 1980년대의 ‘사회성격 논쟁’이 그러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진영의 소멸과 더불어 그러한 ‘비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기대와 신념이 무너지고 오히려 ‘종속과 매판으로 점철되었다’고 비판했던 한국 경제가 세계 경제의 ‘용’으로 추앙받게 된 1990년대에 들어서 이러한 큰 틀의 경제 담론은 사라졌으며, 그와 함께 ‘한국경제론’도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그 뒤로도 여러 정책과 문제 영역에서 뜨거운 토론이 없지 않았으나, 좀 더 거시적인 경제 모델의 차원으로 가면 그 내용도 실로 모호하고 숱한 오해만 양산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말로 적당히 때우고 넘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이제 다시 총체적·거시적 차원에서 한국의 정치·경제 모델에 대한 논의가 부활하고 있다. 먼저 2008년에 전면화한 지구적 자본주의의 위기는 지난 30년간 부동의 규범이요 과학처럼 군림하던 금융자본주의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실패한 모델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했다. 이와 함께 자산시장과 소비시장을 지배하던 낙관주의가 정반대로 선회하면서 그동안 무시되어온 각종 사회경제적 모순과 갈등의 쟁점이 전면화해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만성적 실업, 양극화, 가계 부채, 재벌의 전횡, 복지 요구 등이 순식간에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제 정책 차원만으로 풀 수 있는 개별 사안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주의라는 전체 구조의 동일한 뿌리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므로 그 구조 전체를 새로운 조직 및 운영 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경제 모델로 전환하는, 더 큰 차원에서의구조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시사IN 자료
김상조 교수(왼쪽)는 세세한 데이터를 통해 재벌의 전횡을 막고 경제 효율성을 꾀할 수 있는 제도를 찾아나간다. 장하준 교수(오른쪽)는 금융자본주의의 도그마를 통렬히 비판하고 국가 주도 산업정책 등 폄하돼온 정책을 재평가한다.


김상조 교수의 신간 <종횡무진 한국 경제:재벌과 모피아의 함정에서 탈출하라>와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신간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모두 이런 담론의 전환점에 중요한 이정표로서 주목해야 할 책들이다. 두 책의 저자들은 이미 강력한 자기주장으로 한국 경제에 대한 비판 제언을 던져 그 주장의 선명성 때문에 부당한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현실 참여에도 헌신해왔다. 더욱이 그들이 때로는 암묵적, 때로는 명시적으로 서로를 논적으로 삼아왔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 두 저서는 다루는 내용과 규모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깊은 내공을 가진 저자들의 오랜 고민과 사유가 체현되어 있어서 간단하게 정리하고 평하는 짓을 불허한다. 하지만 서두에 이야기한 대로 대한민국 정치·경제 모델의 선택이라는 화두에서 이 책들을 조망해보기에 좋은 개념이 있으니 거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정치·경제 모델과 ‘상보성’의 개념


이미 1960년대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최소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 자본주의는 조직 원리에서나 제도적 형태에서나 전혀 획일적이지 않고 나라마다 각각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어떨 때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개별의 영역과 제도적 장치가 천차만별로 모두 다르다는 논의에 머물기도 했지만, 지난 10년간 그러한 각국의 경제 모델 다양성을 규명하는 핵심 개념의 하나로서 ‘상보성(comple- mentarity)’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예를 들어 고용과 해고가 비교적 자유로운 영국이나 미국식 고용 관행은 종신고용과 연공서열까지 주어져 있던 1990년대 이전의 일본 대기업식 고용 관행과 차이가 있지만, 이는 단순히 산업 관계에서의 차원만으로 그 가치와 기능성을 비교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기업 전략에서 생산성과 노동 숙련, 조직적 단결 따위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고, 나아가 심지어 기업금융이 직접금융이냐 간접금융이냐, 정부의 산업정책과 지원은 어떠하냐 등의 문제까지 모조리 연결되게 되어 있다. 즉, 제도와 그 영역은 어느 하나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전체 제도의 망들 속의 통합적 일부(integral part)로 존재하고 기능하는 것이기에, 어떤 한 제도에 대한 평가는 결국 그 나라의 정치·경제 모델 전체를 관통하는 제도 간 상보성의 맥락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현존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곳곳에는 가지가지 문제와 모순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이러한 문제와 모순들에 대한 해법을 협소한 개별 사안 차원 내부의 합리성에서만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가고 있다. 과연 현재 한국 자본주의의 여러 제도 사이에 상보성은 존재하는가? 혹시 선진국이네, 글로벌 스탠더드네 하면서 이런저런 제도와 관행을 베껴오다가 되레 있던 상보성마저 파괴된 상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다시 정책과 제도들끼리 상보성을 갖도록(일본어 냄새 나는 속어를 용서하신다면 그야말로 ‘아다리가 서로 맞도록’) 하자면 어떠한 조직 및 운영 원리를 가진 정치·경제 모델을 건설해나가야 할까?



종횡무진 한국 경제
김상조의 선택은 ‘구자유주의’?


김상조 교수는 그를 비난하는 진영에서 “진보의 탈을 쓴 신자유주의자”라는 악평까지 듣는 경우가 있으나 그의 저서를 읽어보면 그러한 단순화된 악평은 실로 부당한 캐리커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단순히 어떤 이념적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똑같은 문제를 던져 똑같은 해답을 계속 반복하는 진짜 신자유주의의 교조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어디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생각하고 손대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등을 밝혀나가는 그의 논리는 정직하고 성실하다. 진보 진영 논객이나 학자들이 흔히 빠지곤 하는 결함, 즉 미리 정해져 있는 논리와 주장의 틀을 그대로 활용하는 손쉽지만 무책임한 모습을 이 두꺼운 책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책 전체를 통틀어 세세한 데이터와 각 영역의 각론에 천착해가는 과정에서 김상조 교수가 끊임없이 고민을 집중하는 지점은 바로 “어떻게 여러 제도와 영역들 사이에 통일적인 조직 및 운영 원리를 갖춘 상호 보완성을 부여할 것인가”이다. 예를 들어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김상조 교수는 재벌 개혁의 방향 또한 단순히 주주 권리의 강화만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한국 특유의 여러 법적·제도적 환경 안에서 실제로 재벌의 전횡을 효과적으로 막고 경제 효율성을 꾀할 수 있는 제도를 찾기 위해 다양한 관점과 시점에서의 토론에 해답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그가 그러한 상보성을 담지한 정치·경제 모델의 원리로 제시하는 것은? 그 자신의 표현으로 법과 제도의 질서가 확립되어 있는 ‘구자유주의’라고 한다. 이 부분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스미스, 밀, 마셜에 이르는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사상은 만물 만사, 심지어는 극도의 사회적 갈등까지도 모두 상보적 관계로 엮인 경제 질서를 제시해 그려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인간 세상 어디에도 존재한 적이 없는 세계, 폴라니의 표현으로 그야말로 ‘적나라한 유토피아’이다. 110년 전 베블런이, 그리고 80년 전 뮈르달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그 세계는 18세기 유럽인들이 가상으로 그려낸 ‘자연법’의 세계일 뿐이다. 영국에서나 미국에서나 19세기 이래 실제로 존재했던 자본주의는 그러한 ‘구자유주의’의 허울을 내걸고 실제로는 온갖 탈법·불법·폭력을 구사하며 오로지 ‘비즈니스’에 골몰했던 공장주들과 로스차일드 가문, 그리고 미국의 ‘날강도 귀족들(robber barons)’이 날뛰던 세계였다.

김상조 교수가 희구하는 ‘최소한의 법과 제도의 질서가 자리 잡고 공정·공평의 경쟁이 가능한 자본주의’는 사실상 1930년대 이후 뉴딜 등 규제된 자본주의의 시대에 등장한 것이었다. 요컨대 여러 경제제도가 안착되어 서로 간의 상보성을 발휘해 하나의 조화와 질서를 이루는 경제 모델은 ‘구자유주의’가 우상으로 내건 ‘자유시장’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규제하고 조정하는 가운데서 출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도 간의 상호 보완성을 내장한 바람직한 정치·경제 모델의 모색 또한 낡은 19세기 그림책에나 나오는 ‘구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연모가 아닌,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현실에 들어맞으면서 실제로 구현이 가능한, 모종의 ‘잠정적 유토피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시사IN 윤무영
2008년 삼성그룹 경영쇄신안을 발표하는 이건희 회장. 재벌 개혁은 한국 경제의 ‘뜨거운 감자’다.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책은 흔히 널려 있는 ‘신자유주의’ 비판과 확연히 구별되는 장점이 있다. 신자유주의란 실제로는 자본 및 금융시장을 통한 소수의 자본 축적 프로젝트인 금융자본주의일 뿐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요컨대 ‘글로벌 스탠더드’처럼 통하는 수많은 교조와 교리가 기실 금융자본주의라는 일개 경제 모델의 운영 원리에 불과하며, 또 그 모델의 많은 제도들은 다 금융자본 세력의 축적이라는 목적에 복무한다는 상보성을 갖는다는 점을 일관되게 폭로하고 있다. 그래서 ‘쾌도난마’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세 사람의 진술은 거침없고 그러면서도 분명한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정승일은 자신들 논의로부터 함의를 극도로 뽑아내어 현실에 대해 공격적이라 할 만큼 명쾌하고 분명한 판단과 제안을 내놓고 있지만 곱씹어보면 다시 또 생각하게 만드는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특히 보수가 아닌 진보 측의 경제 담론에 깊이 파고들어 있는 여러 화두와 의제가 사실상 이러한 금융자본주의 경제 모델의 연장이요 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많은 논의를 할애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진보 진영에서 보통 ‘절대악’으로 인식되는 박정희식 국가 주도 산업정책의 발전 모델과 재벌 체제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들 또한 박정희 체제를 찬양하고 재벌 일가의 소유권을 비호하는 주장을 편다는 악선전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이 또한 오해일 뿐이다. 이들이 내걸고 있는 태도는 경제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자유주의건 마르크스주의건 그 모든 이념과 도그마의 선입견을 벗어나고자 하는, 굳이 이름 붙이자면 ‘경제적 현실주의’라고 할 만한 것이다. 금융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여러 제도 간의 상보성을 담보할 수 있는 대안적인 조직 및 운영 원리를 찾는다는 관점에서 지금까지 금융자본주의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부당하게 왜곡 폄하된 국가 주도 산업정책이나 기업집단 체제의 역할과 의의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온당한 주장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빠져 있다는 공허감을 느낀 이 또한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20세기 각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험을 볼 때, 상보성을 담지한 일관된 정치·경제 모델을 건설하는 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첫째는 기술 발전과 산업구조의 변화를 어떻게 최대한 선도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할 것인가, 둘째는 그러한 각 제도 간에 상보적인 조정을 부여할 수 있게 만드는 가치와 이념은 무엇이고 이에 대한 다수 국민의 합의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동원해낼 것인가이다. 분명히 지금 우리가 사는 2012년은 1970년대와는 도저히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상전벽해 같은 기술 발전과 산업구조 변화를 겪고 있는 시기이다. 동시에 금융자본주의라는 기존 정치·경제 모델의 가치관과 이념은 결정적 타격을 받았지만, 수익성과 자본가치 극대화라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경제의 조직 및 운영 원리가 명확히 나타난 것도 아니요, 그것이 다수 대중의 민주적 합의를 얻어내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장하준식 주장의 공허함


이들은 제조업 폄하와 탈산업 담론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한국의 1970년대 ‘캐치업’식 경제성장이나 1980년대 말 ‘포디즘’식 경제성장 모델이 지금도 가능하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적극적 산업정책이라고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분명히 변화된 기술적·산업적 발전에 걸맞은 형태로 제시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대안적 모델을 건설하는 일은 그것에 이해관계를 갖는 다양한 사회 세력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포섭해 동의시켜낼 것인가를 모색하는, 즉 ‘역사적 블록’을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의 이익을 새로운 경제 모델의 작동 원리와 어떻게 조응시킬 것인지에 대한 논의 또한 이 책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이 책이 이러한 문제까지 포괄해 대안적 경제 모델의 얼개를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논의가 빠져 있는 상태에서 박정희 모델과 재벌 체제에 대한 재평가의 논의만 나오는 형국인지라, 신자유주의 이전의 모델을 다시 요구하는 시대착오라는 오해, 그리고 사실상 국가 관료들과 재벌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냐는 오해까지 빚어내는 촌극이 벌어질 여지는 피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필자의 안목으로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주의의 여러 문제에 짓눌려 있는 대한민국 경제에 활로를 틔우기 위해서는, 단순히 이런저런 새로운 정책과 새로운 제도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여러 정책과 제도들에 상보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일관된 조직 및 운영 원리를 담지한 새로운 정치·경제 모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진보 진영 전체에 확산되어간다고 보인다. 그동안 상호 평행선 혹은 대극의 처지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지던 두 책의 저자들이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만은 동의의 기반이 생겨나고 있다고 보인다. 구체적 각론에서의 차이점들은 물론 크고도 깊은 것이지만, 이제 바야흐로 “한국 정치·경제 모델의 얼개를 새로 짜나가자”라는 큰 질문이 모두의 화두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중차대한 진전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진보 진영은 신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수세적 비판이 아니라 대안적 모델의 구상이라는 능동적·창조적 태도로 전환해가고 있다.